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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교회에서 아름다운 꿈을 이루세요!

 

조회 수 : 1021
2012.12.16 (16:51:59)

 

<큰기쁨새샘교회 2012년 제직교육(과제물자료)>

 

 

 

 

1. 교회란 무엇인가

 

지금부터는 교회론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회란 말은 사복음서 중에서 오직 마태복음 16장 18절과 18장 17절에만 나온다. 교회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교회라고 하면 고딕식으로 지어진 그 웅장한 건물을 연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당이고 교회란 주님의 몸인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교회란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로서 신약성경에 115번 사용되고 있다. 주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과 일반서신에 많이 나온다.

 

그 중에서 92번이 지역에 있는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하고 나머지는 모든 시대의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 교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란 말은 본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칼뱅은 교회를 보이는 교회(지역의 교회)와 안 보이는 교회(보편적 교회)로 나누었다.

 

교회는 구약교회와 신약교회로 나눌 수 있는데 구약교회는 에스라에 의해 유대교가 형성되기 이전의 성도들을 의미한다. 신약교회는 오순절 이후에 형성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처음의 교회는 변화하는 필요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그러나 장로직과 집사직이 구성되면서 조금씩 조직화돼 온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형성을 보면 마치 개척교회처럼 처음에는 함께 모여 기도하다가 그 숫자가 120명,3000명이 되면서 필요에 의해 장로직과 집사직이 생기게 되었다. 교회란 원어인 에클레시아(Ekklesia)란 말은 에크와 칼레오란 말(Ek=from,Klesia=Kaleo에서 유래 되었는데 그 뜻은 ‘부르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뜻은 세상에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은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점이다. 신약에 나타난 교회는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첫째로 교회는 세계적이란 점이다. 즉,“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거듭난 백성들”(보편적 교회)(마 16:18; 엡 5:24∼25; 히 12:23)을 말한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편적 교회를 의미한다.

 

둘째로 교회는 지역에 있는 성도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사실 오늘날 교회라고 할 때 건물을 의미할 때가 많다. “당신의 교회가 어디에 있지요?”하고 물을 때 그것은 교회의 건물을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님의 건물이다(벧전 2:5).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 교회를 결혼에 비유하여 신부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엡 5:22∼25).

 

 

 

2. 교회(교파)의 종류

 

비신자들이나 초신자들은 왜 그렇게 많은 종류의 교회(교파)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초대교회 당시의 고린도교회를 보아도 4개의 파벌이 있었다.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그리스도파가 있었다(고전 1:12). 이것을 바울은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에만 200개가 넘는 교파가 있다.

 

교파의 역사를 간단하게 보면 1054년에 정치적 이유로 인해서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로 나누어진 데서 기독교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로마가톨릭교회에서 프로테스탄트교회(1517)와 영국의 성공회(1534)가 분리되었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다시 칼뱅파와 루터파,종교개혁파로 분리되었고 그 후에 성공회에서 감리교회와 유니테리언,퓨리턴제파가 분리되고 퓨리턴제파에서는 퀘이커파와 침례파,회중파 등이 분리되었고 감리교회에서는 구세군이 분리되었다. 동방정교회는 1589년에 그리스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로 분리되었다.

 

왜 이렇게 많은 교파가 생겼는가?

 

첫째는 교리적인 차이 때문이다. 비신자나 초신자들이 볼 때에는 교리가 무엇이기에 이처럼 많은 교파로 나누어졌는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일리있는 말이다. 그러나 관계된 사람들의 생각은 교리가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분리하는 것이다.

 

둘째는 정치적 민족적 파워게임 때문이다. 파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차라리 나누는 것이 편하고,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역감정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셋째는 상호간의 이해관계 때문이다. 이해관계란 자리다툼이나 물질적 관계를 말한다. 교파의 분열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만약 우리가 다양성을 서로 인정해주고 양보했다면 이렇게 부끄러울 정도로 많은 교파가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교파의 분열로 인해서 교회가 성장해 왔다는 것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기독교의 분열은 비성경적이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로 인해서 서로 성장을 위한 경쟁을 하고 서로 다른 특징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그런 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핑계는 될 것이다.

 

그러나 선교지에 가보면 교파 분열로 생기는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상한 것은 선교를 위한 차원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생겼지만 불행하게도 그로 인해서 한국에는 보·혁의 큰 구별이 생겨난 것은 또 하나의 역사적 아이러니다.

 

 

 

 

3. 신약에 나타난 교회론

 

 

신약성경에 보면 교회를 여러 가지 은유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 그 중에서 세 가지 은유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머리와 몸의 관계로 본 것이다. 머리가 몸에게 명령을 내리고 인도해서 온 몸을 지배하듯이 그리스도께서도 교회를 인도하고 지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말씀처럼 “너희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것이다.

 

몸을 보면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각 부분은 크든 작든 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건물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서 잘 지었다고 말하지만 그 건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바울은 분열이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몸 가운데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 12:25) 건물처럼 눈에 보이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이름도 빛도 없이 일하며 보이지 않는 성도도 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들은 서로 받쳐주고 연결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둘째로 교회를 하나님의 건물로 표현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묘사했다.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그러면 그리스도와 사도들,성도들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에베소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의 권속이라”

 

셋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결혼의 신비를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표현하였다(엡 5:25∼27,31∼3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관계란 뜻이다. 이처럼 신약에서는 교회를 몸,건물,신부의 은유를 통해서 교회의 성격을 설명해주고 있다.

 

 

 

4. 교회에는 어떤 직분들이 있는가

 

 

성경을 보면 크게 세 단계로 직분이 변천된 것을 볼 수 있다.

첫번째 단계는 예수님 당시의 직분이다. 당시에는 12제자와 70인 제자들을 임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에 교회가 조직화되면서 집사 장로 감독의 세 직분이 있었다. 이것을 흔히 항존직이라고 부른다.

두번째 단계는 사도시대인데 신약성경이 교회마다 유포되었던 때이다. 그러나 이때에 선지자들과 사도직이 계속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세번째 단계는 감독(목사)과 장로직이 생겨서 성도들에게 영적 진리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지역의 교회들을 훈련시킨 시기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7절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여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개신교에는 크게 세 가지의 교회정치가 있다.

첫째는 감독제도(Episcopalianism)이고, 둘째는 장로제도(Presbyterianism)이고, 셋째는 회중교회(Congregationalism)가 있다. 여기서 감독제도는 교회의 주된 권위를 감독들에게만 준다. 장로제도는 회중에 의해서 선출되어 안수받은 장로들에 의해서 교회를 치리한다. 한국에서는 이 제도가 감독제도나 회중교회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회중교회는 두 가지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는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만인제사장주의이다(벧전 2:9). 회중교회는 일반적으로 장로직이 없고 대부분 목사와 집사로 되어 있다.

 

한국 개신교회에는 여러 직분이 있다. 직분은 교단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중에 항존직(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성경에 나오는 직분)에는 목사 장로 집사가 있다. 집사직은 초대교회에서는 장립집사(흔히 안수집사라고 부름)만 있었지만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서리집사(항존직이 아닌 일년직)가 생기게 되었다.

 

장로직은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직과 치리하는 장로(흔히 말하는 장로직)로 구별된다. 성경에 나오는 권사는 목사를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오늘의 권사직은 한국에만 있는 일종의 편법에 속하는 비항존직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장로직을 인정치 않은데서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교회의 분포로 보면 여자가 성도의 3분의 2가 넘기 때문에 안수집사직도 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여자들의 권사직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안수 문제는 교단마다 다르나 점차 넓혀지고 있다.

 

 

 

 

5. 교회의 5대 사명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고 난 후에 구원사역을 교회에 맡겨 주었다. 이론적으로는 교회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교회는 노아시대의 방주처럼 주님의 손이 되어 구원사역을 주로 이루어간다. 물론 교회의 사명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어떤 교회든지 크게 5가지의 사명을 다 가지고 있다.

 

첫째는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식이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게 되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영광을 찬양하며 기도하게 된다. 예배에는 말씀 기도 찬송 헌금 교제 축도가 있다. 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에 회의 때도 예배로 시작하고 하루의 일과도 예배로 시작한다. 예배는 교회의 사명 중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건물)를 예배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이 교육은 주님께서도 직접 실시하였고 또 교회에 위임하였다. 지상명령에서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고 하셨다.

 

셋째는 전도이다. 우리가 흔히 간단하게 국내 전도와 국외 전도(선교)로 나누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사실 전문적으로 말하면 전도보다 더 폭이 넓은 것이 선교이다. 왜냐하면 전도가 복음화라고 하면 선교는 복음화 더하기 봉사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선교는 돈 많은 교회만의 사명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건물이 있기 전에도,또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되기 전에도 선교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말하자면 선교는 교회의 본질이다.

 

넷째는 구제이다. 구제는 간접 전도도 되지만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 결과에 관계없이 교회는 계속해서 구제를 해야 한다. 집사직이 생기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구제를 위해서 시작된 것이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교제이다. 로마의 카타콤에 가보면 아직도 많은 해골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비밀리에 믿기만 하였다면 구태여 모이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생명의 위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은 계속해서 교제를 하였다. 이 코이노니아(Koinonia)는 기독교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큰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교제가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교회는 이 교제를 등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은 모임이 많아 교제를 해야만 봉사와 구제도 할 수 없다.

 

 

 

6. 교회의 성례들

 

 

교회에는 여러 거룩한 예식(성례)이 있다. 천주교에서는 7가지의 예식을 성례라고 부른다. 세례 성체(성찬) 견진(堅振) 고백 병자 신품(神品) 혼인 등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신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행한다.

 

(1)세례식

 

세례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성례적 견해(sacramental view)가 있다. 로마가톨릭과 루터교에서 이 견해에 따르는데 세례를 통하여 실제로 죄가 용서된다고 믿는다. 루터교의 차이점은 세례받는 자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물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믿는다.

 

둘째 언약적 견해(covenantal view)가 있다. 세례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으로 믿고 어른은 물론 어린아이에게도 행한다. 유아세례의 근거가 바로 이 언약적 견해에 있다.

 

셋째 상징적 견해(symbolic view)이다. 세례가 죄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 씻김의 상징으로 본다. 즉,순종과 헌신의 상징으로 세례를 행한다. 대부분 개신교의 견해가 여기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장로교에서 유아세례를 주는 것은 언약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침례교에서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신앙고백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언약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2)성찬식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3∼26)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찬식을 행한다. 1년에 적어도 2차례(부활절과 추수감사절) 행한다. 여기서 기념한다는 말의 히브리어 개념은 단순히 기념하거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2000년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현재적으로도 일어나며 거기에 성도들이 믿음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 성도들은 더 큰 은혜를 받는다.

 

그러면 성찬의 의미는 무엇인가? 천주교에서는 포도주와 떡(원문의 뜻은 빵)이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화체설(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다.

 

루터교에서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하는 것은 아니고 함께 공존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성체공존설(consubstanti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대부분의 개신교에서는 상징적 기념설(symbolic memorial)을 주장한다.

 

 

 

7.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이라고 하는데 그 말은 ‘worthship(가치가 있는 것이란 뜻)’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약의 예배는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의 예배(첫 새끼와 기름의 번제)와 가인의 예배(땅의 소산의 소제)에서 시작한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 때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라고 말씀한 것으로 보아 제물을 바치는 제사(예배)를 드린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모세 때에 와서 이 예배는 여러가지의 형태로 변화되었다.

 

구약의 예배는 레위기에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소위 5대 제사가 바로 그것이다. 레위기 1장에는 번제,2장에는 소제,3장에는 화목제,4장에는 속죄제,5장에는 속건제가 나온다. 자세한 설명은 ‘이야기 신학’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각도에서 그 뜻을 언급하려고 한다. 번제는 헌신과 순종을 말하고 소제는 봉사를 의미하고 화목제는 평안을 뜻하고 속죄제는 대속을 의미하고 속죄제는 만족을 말한다. 이 5대 제사에서 중요한 것은 ‘온전히 드리라’는 데 있다.

 

신약의 예배는 구약의 예배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로 특징되고 있다. 신약의 예배는 영적 복음서인 요한복음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4장 23∼2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약으로 접어들면서 예배의 날짜도 안식일(토요일)에서 주일(주님의 날)로 변하였다. 안식일은 창조기념일이고 주일은 부활기념일이기 때문에 신약시대인 지금에는 실체가 왔기 때문에 그림자를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놀랍게도 주일(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경배하는 날)과 일요일(태양신을 섬기는 날)이 같은 날이었기 때문에 콘스탄틴황제 때 이 날을 공휴일로 정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주일성수의 방법은 보다 영적이고 기쁨과 감사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주일성수가 바리새적인 면이 많은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면 참된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 영어로 예배를 ‘worship service’ 혹은 그냥 ‘service’라고 부르는데 그 말 속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즉,예배는 생활과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주일에 보면 웬 성도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러나 월요일부터 토요일에는 성도들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 문제이다.

 

 

 

8.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성경에는 세상을 나쁜 뜻과 좋은 뜻으로 다 사용하고 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서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라고 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교회는 세상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한국의 많은 교회가 교회를 위한 교회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교회는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파송한 천국지점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을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였던 것이다(마 5:13∼16).

 

무슨 뜻인가? 소금은 일상생활에는 물론 공업용으로도 많이 사용된다. 소금이 얼마나 귀했는가 하면 로마시대에는 봉급으로 대용되었다. 봉급(salary)이란 말이 소금(salt)이란 말에서 유래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소금에는 일상생활에서 크게 두 가지로 사용된다. 첫째는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둘째는 맛을 내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역할이란 말이다.

 

다음은 빛이라고 하였다. 빛은 생명의 근원이다. 빛이 없으면 모든 생명은 죽는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다”(요 12:46)고 말씀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복음의 빛,진리의 빛이 되어야 한다. 15절에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놀라운 것은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16절에서는 빛을 착한 행실로 말씀하고 있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의 선행이 바로 세상의 빛이 된다. 지금 세상이 어두운 것은 성도들의 복음의 빛이 가려 있고 또 선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으로서의 사명일 뿐이다. 교회는 또한 집단으로서의 사명도 있다. 우리가 정치신학 세속화신학 해방신학같은 극단적 방법에는 반대할 수 있으나 사회 참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부정할 수는 없다. 교회는 개개인들의 구령사업은 물론 사회까지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구령사업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글화일로도 첨부하였습니다.

꼭 읽어보시고 독후감상문을 12월 30일(주일)까지, 동의서와함께 제출해주셔야합니다.

 

 

 

 

 

 

 

목동교회에 오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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